2024. 8. 22. 19:03ㆍ완화의학/죽음과 심리적 이해
정신적 · 심리적 이해
단지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기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면 올바른 완화 치료를 시행하기 위해 환자의 정신적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즉 환자의 취약성과 의존성 증가, 환자의 기대 또는 희망에 대한 대응,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잊어가는 것, 자신의 신체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 등과 관련한 환자의 정신적 문제를 이해하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 의료진에게 필수적인 문제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희망의 약화와 대처 방법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 등은 정상적인 죽음의 과정(애도 반응)에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치매와 같은 경우, 성격 특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작동하던 대처 방법이 약해지면서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기존에는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던 문제에 대해서도 쉽게 불안감이 터져 나올 수 있다. 또한 성격적 특성도 환자 심리의 예측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입증할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많지는 않지만 임상적 경험에 의하면 기존에 쉽게 분노를 느끼던 사람은 더 쉽게 분노를 보이고, 수동적인 사람은 더 수동적이 되며, 사람을 피하던 사람은 더욱 무관심해지게 된다.
암 환자의 경우 다른 질환에 비해 예후를 좀 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지만 만성 질환자의 경우 예후를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만성 신부전 환자의 경우 증상의 악화가 조용히 진행되거나 통증이 덜 심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환자의 경우 좀 더 희망의 여지가 있고 증상과 관련한 타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추가적인 의료 기술(예 : 신장 투석기, 제세동기, 인공호흡기)을 활용한 적극적인 치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환자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료적 도움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좀 더 연장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암 환자와 달리 만성 질환자의 관리를 더 어렵게 하는 요인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섬망 등의 증상이 동반될 경우 심리적 문제가 행동적 문제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둘째, 의료적 · 신체적 상황에 대한 예측이 쉽지 않다. 즉 현재 직면한 신체적 문제가 어느 정도 관리되는 경우 내재된 정신 심리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증상이 예측보다 더 안정되어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개입할 시간도 없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점은 신체적 상태에 따라 안정적으로 대처하던 성격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급격한 행동 문제가 터져 나와 의미 있는 정신과적 개입을 어렵게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변화의 시기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만성 질환자의 희망을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이다. 신약 발매의 기대, 안심할 수 있는 검사 결과에 대한 희망,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치료에 대한 바람 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일률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렵다. 삶에 있어 희망이란 필수적인 요소이며 환자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의 비현실적 기대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치료적 개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말기 만성질환자에 대한 정신심리적 개입을 어렵게 하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희망이 현실에 대한 부인에 가까울 때 환자는 전지전능감에 환상에 빠지기 쉽다. 무의식적 타협에 의한 전지전능감은 의료진에게 무의미한 치료를 요구하거나 기타 대안 방법(예: 한방치료, 민간요법)을 찾도록 할 수 있다. 즉 질병 따위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내가 힘든 것은 의료진의 무능력이거나 내 상태에 비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생각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들과 무의미한 논쟁을 버리거나 주도권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다.
두 번째는 '시간 여행'이다. 환자는 현실에서 벗어나 과거의 건강했던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거나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 속 미래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현실을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불합리한 모습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삶의 마지막까지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환자는 현실과 관계 없는 백일몽에 사로잡히거나 현실감이 붕괴된 정신병적 상태까지도 나타낼 수 있다.
세 번째는 '빌린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치료 과정에서 의료진의 보살핌을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환자는 자신을 의료진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경험에 의존한다. 환자는 자신이 신뢰하는 의료진이 예상하는 예후에 맞추어 자신의 기대를 변호시킨다. 즉 자신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제삼자의 의견과 기분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애도 반응에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개인은 애도 반응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의 통합성을 되찾게 되고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적응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데, '빌린 희망'을 갖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직면하기보다는 제삼자의 눈치만 보기 때문에 적절한 애도 반응을 경험하기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라고 착각하고 살아간다. 따라서 죽음을 직면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며, 이전의 역량을 잃어가는 것이고,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자의 심리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실을 부인하려고 하거나 협상을 하여 이러한 고통을 외면해 보려고 한다. 역량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자살을 고려하기도 하고, 고통이 두려워 안락사를 생각하기도 한다. 앞으로 진행될 무능력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너무 일찍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는 철학적, 종교적, 윤리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판단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의료진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당당하게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고 죽음을 직면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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